문집

石潭遺稿

진주류씨

충경공(忠景公) 류형(柳珩, 호는 석담石潭)의 유고(遺稿, 죽은 뒤 남긴 글)입니다. 시(詩)와 소(疏,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 병자하성복설소丙子下城復雪疏, 혼조폐모시항언소昏朝廢母時抗言疏), 서(書, 편지), 행장(行狀, 생애 기록), 신도비명(神道碑銘, 무덤 앞 비석에 새긴 글), 묘지명(墓誌銘, 무덤에 묻는 기록), 본전(本傳, 본래의 전기) 등을 수록하였습니다. 「진양충의세편(晉陽忠義世編)」과 함께 국역(國譯, 우리말 번역)·간행(刊行, 책으로 펴냄)되었습니다.
📜 실제 원문

가문 기록에서 가져온 원문입니다(한문·옛 표기 포함).

명문가의 전통을 영원히 이어가라
제1편 직계 선조 행적 85 명이 전해 온다. 문순공 민적은 30세에 상처(喪妻)하고 후부인으로 첨의찬성사 원관(元 瓘 : 초명 貞, 1247~1316)의 딸을 맞아 3남 3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급제한 민지(閔漬)가 지은 원관의 묘지명에 의하면, 원관의 아버지는 감수국사 판 병부사 첨의중찬 문순(文純)공 원부(元傅)로 1287년 2월 9일에 졸하였고, 어머니는 봉성군대부인(峰城郡大夫人) 염씨 부인으로 예빈경(종3품) 서원 인(瑞原人) 염수장(廉守藏)의 딸이다. 염수장은 검교상서우복야(정2품)로 치사하고 1265년에 졸하였다. 원관의 조부는 추밀원부사 복야공 원진(元 瑨)이다. 원관은 1266년 20세에 문과 급제하고 1279년에는 독로화(禿魯花 : 또 는 궁전배弓箭陪)로 원에 갔었다. 국가에서 재상의 아들로 재능이 있는 자 10 여 명을 뽑아 원의 조정에 입시(入侍)하였었는데 이때에 총재의 아들인 대 장군 김흔이 우두머리가 되고 원관은 재상의 아들로 부(副)가 되었다. 독로 화는 뚤루게라고도 하는데 원(몽고)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는 대신 고려 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는 제도이다. 따라서 고려의 국왕은 세 자 시절 원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다. 1241년에 10명이 인질로 갔으며, 1271년에 세자 심(諶 : 충렬왕)과 송빈(宋玢 : 또는 분), 설공검 등 귀족자제 20명이 갔고, 1275년에는 세자를 호종하는 사람들에게 3등급을 초월하는 관직을 주었다. 1279년에는 김방경의 아들 김흔, 원부의 아들 원관, 설공검 의 아들 설지충, 그리고 박항, 허공, 이존비 등의 자제를 보냈
판병부사 亞相) - 민인균 (대사성 정3품) - 민황(시랑 정4품) - 민종유(찬성사 정2품) - 민적(대제학, 밀 직사 종2품) - 민사평(대제학, 찬성사 정2품), 민유(대제학 정2품), 민변(대언 정 3품), 민환(추밀원부사 정3품)으로 이어지는 고려의 벌열명문(閥閱名門)이었 기에 그 음덕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행(李行, 1352~1432)은 고려에서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으나, 이 성계 밑에서는 은퇴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이행의 문집인 『기우선생문 집(騎牛先生文集)』 제2권 부록의 두문동72현록에 ‘부원군(府院君) 민유 (閔愉)는 나라의 운이 다한(끝난) 것을 보고 통진 봉상리로 퇴거하고 벼슬